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며 과거 백제, 조선의 수도로 시대에 따라 위례성, 한산, 한성, 한양, 양주, 남경, 경성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암사동 선사주거지를 통해 알 수 있듯 서울은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고,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거쳐 약 2000년의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서울의 역사를 좀 더 상세히 알아보기 위해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시대를 구분하였으니 시대에 따른 서울의 역사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대서울
선사시대, 서울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
- 신석기 시대 : 기원전 8,000~7,000년 무렵 이후
- 청동기 시대 : 기원전 13세기 무렵
선사시대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시대로 구석기, 신석기 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한강 유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로 강남구 삼성동 50번지 일대에서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 등 구석기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았던 것은 신석기 시대이며, 신석기 시대 유적은 서울 곳곳에서 발굴되었는데 이중 대표적인 것이 강동구 암사동 유적이다.
청동기 시대는 본격적인 농경기 문화가 시작되는 때로 강남구·강동구·송파구 등에서 청동기시대 집터가 발굴되고 한강 유역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널리 사용되던 민무늬 토기인 가락동식 토기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특히 한강유역에는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계급사회가 성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이러한 정치적 집단이 이후 백제 건국에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서울은 500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 백제의 지배 : BC 18 ~AD 475
- 고구려의 지배 : AD 475 ~ AD 551
- 신라의 지배 : AD 551 ~
기원전 18년, 백제는 위례성을 수도로 하여 나라를 세웠다.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가 위례성이 위치했던 곳으로 위례성은 후에 큰 성이란 뜻인 한성 혹은 대성이라는 명칭으로도 불 렸고, 왕이 거주하던 곳이란 뜻으로 왕성이라고도 불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에 의해 한성이 무너지면서 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게 되지만 49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 탓에 서울 곳곳에서 백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송파구 풍납토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송파구 석촌동, 가락동, 방이동에 가면 실제 백제 고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근방을 중심으로 백제인들이 사용 한 토기, 기와, 농기구, 유리 제작에 쓰인 거푸집 등 다양한 백제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서울에는 삼국의 문화유적 다 있다
475년 백제에게 한성을 뺏은 고구려는 사령부를 몽촌토성에 두고 한강 건너편 아차산에 보루를 설치해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몽촌토성에는 백제의 유물 뿐 아니라 고구려 사람들이 사용한 토기와 와당 등도 발견되었고 고구려 사람들이 설치한 보루를 아차산, 망우산, 수락산 등지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고구려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다툼과 돌궐의 침략으로 힘이 약해졌고, 551년 신라, 가야, 백제의 연합군에 밀려 76년간 차지했던 한성에서 쫓겨나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한성을 차지해 중국과 직접 교류하고 싶었던 신라는 다시 고구려와 협약을 맺고 백제를 무너뜨려 554년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확보하게 된다. 신라의 진흥왕은 한성 지역이 신라의 영토임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북한산 비봉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북한산진흥왕순수비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에 의해 멸망하기 전까지 서울을 지배했던 탓에 서울에는 신라의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 뿐 아니라, 보물 제 235호인 장의사 당간지주, 다양한 신라 고분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서울과 가까운 광주 남한산성, 하남시 이성산성에도 신라 유물이 많이 출토 되었다.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의 문화유산이 모두 발견된 곳은 서울지역 뿐으로 이것이 고대 서울 역사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서울의 이름은 "남경"
- 고려의 지배 : AD 898 ~
신라를 귀속시키고 후백제를 정복하여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구려의 후계자란 뜻으로 ‘고려’ 란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 당시 서울은 ‘양주’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편리한 교통과 풍부한 물산 등 유리한 자연지리적 여건 때문에 1067년 고려 제방 제도상 최고 지위 중 하나인 ‘남경’ 으로 승격된다. 이후 다시 양주로 격하되었다가 남경으로 격상되는 변화를 겪었지만 1101년 이후부터 고려말까지는 남경으로 승격되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고려말 공양왕 당시, 왕조가 혼란스러워지자 난세를 타계하기 위해 당시 ‘한양’이라 불렸던 서울로 수도를 이전하지만 정치상황이 더 불안해지는 바람에 6개월 만에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이전하는 혼란을 겪는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한양을 수도로 지목하면서 서울은 조선의 수도로 거듭나게 된다.
서울, 조선의 수도로 거듭나다.
- 한양, 조선의 수도로 천도 : AD 1394 ~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조선을 창건하고, 1394년 한양을 조선의 수도로 확정한다. 1395년 경복궁과 종묘·사직단이 준공되고 1405년 창덕궁이 낙성되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한 실질적인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조선은 수도 한양을 보호하기 위해 백악(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을 따라 약 18킬로 미터의 성곽을 쌓았고, 왕의 생활공간이자 통치공간인 궁궐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을 지었다. 이 곳을 조선의 5대궁이라 하며 조선의 왕이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창덕궁이다.
조선시대 통치기구는 의정부·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를 비롯한 육조와 사헌부·사간원 등의 특수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날 광화문 앞 세종로에 육조가 모여 있었고, 이를 육조 거리로 불렀다. 오늘날의 국립대학으로 볼 수 있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과 중등교육 기관으로 볼 수 있는 4부 학당도 사대문 안에 위치하는 등 서울은 명실공히 조선 정치·행정의 중심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사적 제125호 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에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매년 제례를 지냈고 광화문 서쪽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사직단에서 곡물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제를 매년 거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이라 불렀다. 북촌은 종로구 가회동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양반 관료들이 모여 살았고 남촌은 중구 필동을 중심으로 가난한 선비들과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 그 중간에 종로가 있는데 종로에 상인들이 장사를 하는 시전이 위치해 있어서 도성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금 서울의 중심인 한강은 전국에서 거둔 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급한 소식을 알려야 할 때는 남산 봉수에 연기를 피워 소식을 전했다. 지리적으로 동아시아 중심에 위치한 탓에 조선은 동북아시아 각국과 긴밀한 대외관계를 유지했고, 이에 따라 서울에는 각국의 외교 공간들이 있었다. 중국 사신들이 머문 곳은 태평관(現 국민은행 서소문지점 위치)과 모화관(現, 서대문구 현저동)이었고 일본과 남방국가 사신들은 동평관(現, 중구 인현동 2가 192번지), 만주 여진족은 북평관(現,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 위치)에서 머물렀다.
조선 후기 서울, 폐허를 딛고 문화의 꽃을 피우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7년간의 조일전쟁(임진왜란)은 조선에 큰 전쟁의 상흔을 남겼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탔고 사대문내 백성들의 민가 70~80퍼센트가 불타 없어지는 등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매우 컸다. 뒤이어 1624년 이괄의 난,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면서 서울은 많은 피해를 겪었고, 도성 안은 청군의 노략질로 텅텅 비게 되었다. 이후 조선은 흩어진 민심을 바로 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가장 먼저 군사제도를 개편하고 도성을 보수했다. 숙종 때에는 도성의 무너진 부분을 수축하고 북한산성을 축조하는 등 도성의 방위 체계를 보다 확실하게 수립 하였다. 한편 조선 왕실은 전쟁으로 불탄 경복궁 대신 창덕궁과 창경궁을 먼저 재건했고 조선 후기 왕들은 창덕궁과 경덕궁을 오가며 생활하게 된다.
조선 후기가 되면 종로 중심인 시전상인에서 벗어나 중구 청계천변 일대, 동대문 이현과 남대문 칠패 시장까지 상업지역이 확대된다. 또한 한강의 용산·마포·서강·송파 등 포구를 중심으로 한 경강상인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조선 초부터 정치·경제의 중심이었던 서울은 전국 최대의 수공업 단지이기도 했다. 수공업단지는 주로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 집중해 있었는데 종로구에는 왕실 의복을 만들던 상의원과 음식과 음식 담는 그릇을 만들던 사옹원이 있었고 창의문 밖에는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 등이 있었다. 이러한 수공업의 영역이 조선 후기에는 도성 밖으로 확대되면서 조선 경제를 활성화하고 서울이 조선 후기 상공업도시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새롭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이 젊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파가 탄생하게 된다. 실학의 대두로 인해 서양의 과학기술이 조선에 들어왔고 천주교 사상이 함께 전파되기도 했다. 초기 천주교는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되다가 차츰 신앙으로 발전했으나 성리학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교리 때문에 결국 박해를 받았고 현재 양화대교 옆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었다.
조선 후기에 크게 변했던 또 하나는 신분 체계였다. 산업 활동이 다변화되고 경제생활이 진전되면서 사회계층 간 신분 이동과 신분 분화가 활발해지면서 농민이 양반으로 승격되는 일이 빈번 해지고 노비 해방이 본격화 되었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따라 문학과 예술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문학으로는 정치부패와 사회 모순을 비판하는 허균의 홍길동전, 작자미상의 전우치전, 사실적인 언어표현을 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이 발표되었고, 그림으로는 우리나라 산천을 그대로 그리는 진경산수화 화풍이 유행 했다. 일반 서민들의 생활풍속이나 여인들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도 크게 유행했는데 대표적인 풍속화가로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을 들 수 있다.
서울, 문을 열고 국제무대로 나서다.
- 1895. 10. 8 을미사변
- 1897. 10. 12 대한제국 선포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270년이나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은 1868년에야 중건되었다. 경복궁 중건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오랜 세도정치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진행했던 것이다.
조선을 향한 서구 열강의 끈질긴 개항 요구와 침입이 있었고, 조선은 프랑스군과 미국군이 침입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격퇴하기도 했지만 결국 1876년 부산·인천·원산 등의 항구를 개방했고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었다. 당시 조약 내용을 보면 관세 주권에 제한을 두는 등 불평등한 내용이 많았다. 이에 따라 조선의 상권이 외국 상인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아지고 일반 서민의 생활이 곤궁해졌다.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대한제국의 금융과 재정을 장악하면서 조선 상인들의 몰락이 가속화 됐지만 국채보상운동, 식산흥업운동, 근대교육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조선의 상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1870년대 중반 무렵 한성의 젊은 양반들 사이에 개화사상이 퍼지면서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었다. 그 중 김옥균 등의 무리가 청 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에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신정권을 수립하지만 청군의 공격에 의해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게 된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우정국 옛터는 현재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1895년 5월 삼국간섭이후 조선에서의 일본의 위신이 급격히 추락하자 일본은 그 배경에 명성황후가 있다고 판단한다. 이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이 되어 1895년 10월 8일 일본군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무는 건청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명성황후 시해로 인해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범인인 미우라 공사 등을 구금하지만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해 버린다.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궁녀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기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알리기 위해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고 대한 제국 초대 황제로 즉위한다. 근대국가로 가기 위해 교육과 산업을 육성하고 전기·전차·전화·철도 등 근대문명을 활발히 도입하면서 서울시민들의 생활을 많이 바꾸어 놓지만 일본 등 외국 세력의 간섭이 심하여 근대국가 수립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자주독립국이 되기 위한 조선의 염원은 서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서울 사직터널 밖의 독립공원이다. 그 곳에는 독립문과 독립관, 서재필 동상이 있다. 독립협회를 만든 서재필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독립문을 세우고 최초의 한글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서울에서 처음 전차가 운행된 것은 1899년으로 빠르고 편리한 기능 탓에 도시교통수단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00년 한강철교가 가설된 후 철도는 전국으로 뻗어 나갔고 1930년대 말에는 한반도 내륙 산간지역까지 철도망이 확대되었다. 철도의 도입으로 보름이 걸리던 서울과 부산이 하루면 갈 수 있었고, 남녀노소가 몸을 맞대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 평등사회를 만들었지만 이러한 문명의 이기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열강들이 대한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들어온 것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돕는 역할을 했다.
민족독립운동기 서울, 시련을 겪다.
- 1905. 11. 17 을사늑약
덕수궁 근처 골목길 안쪽으로 가면 1900년 러시아 건축가가 지은 최초의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인 중명전이 있다. 중명전은 1905년 11월 대한제국이 일본제국과 을사늑약(을사조약)을 맺은 곳 이다. 황제의 옥쇄도 날인되지 않고 무력으로 맺은 조약에 반발해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란 사설로 협약의 부당함을 토로했고 민영환은 협약에 항거하여 자살하고 안중근 의 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등 전국 각처에서 반일 여론이 확산되고 일본을 처단하려는 의병투쟁이 크게 번져갔다.
일본이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한 후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서울의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남대문로와 을지로, 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서 울의 도로와 구역을 개수한다. 그러나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종로 북쪽은 개발을 진행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은 식민 통치 권력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서울 곳곳에 서양식 건물을 건설하고 전시 공업화를 위해 용산과 영등포 일대에 중화학공장을 대거 건설했다.
서울에 일본인 거주자와 기업가가 늘어나면서 지금의 명동에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1906년 열렸고 1920년대에는 죠지아 백화점, 미나카이백화점 등이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조선시대 육의전이 밀집해 있던 종로에는 한국인 최초로 박흥식이 1931년 화신백화점을 열었고, 1934년에는 전국에 체인점을 개설하고 37년에는 지하 1층에서 6층까지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초현대식 건물로 변신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경성의 변화에 따라 서울시민들의 생활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북촌에는 전통 한옥 대신 문간방과 사랑방이 없어진 개량 한옥이 늘어났고 커피나 맥주를 파는 카페, 케익이나 카스테라 같은 고급빵을 파는 곳도 등장했고 거리에는 국화빵이나 중국식 호떡을 파는 곳도 생겼다. 전기도 일반 가정으로 보급되었고 1910년대에는 가로등이 켜질 정도로 전기 사용이 일상화 되었지만 이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1930년대까지도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장작으로 취사와 난방 연료를 대체했다. 1920년대 들어서는 전차가 대중교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9인용 승합택시도 등장했다.
대한제국을 패멸한 후 일본은 동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는 등 조선의 흔적을 없애기 시작했는데, 특히 궁궐을 많이 파괴했다. 경복궁이 첫 번째 대상으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는 명 목 하에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을 헐고 부지를 파헤쳤다. 1929년에는 다시 대규모 조선박람회를 개최하면서 건청궁 등의 전각을 다수 헐었고, 박람회가 끝난 후에는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 를 건립했다. 경복궁의 훼손 뿐 아니라 창덕궁을 통감부 간부와 친일 인사들의 연회장으로 바꾸면서 주변 전각을 허물었고,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바꾸 었다.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졌고 이는 한반도 전체와 만주 및 미주 한인사회로까지 확산되었다. 3·1운동은 나라 안팎에서 전개되는 항 일민족 운동의 촉매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게 했다. 하지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1907년 건립된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서울은 독립운동과 민족운 동이 끊이지 않았던 곳으로 의열단원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기도 하고 김상옥이 종로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암살과 파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의열단은 향후 군대를 창설해 항일독립전쟁을 벌이는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하게 된다.
서울, 대한민국 수도로 출발
- 1945.8.15 해방
-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서울은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38선을 경계로 미국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게 되고 두 연합군이 신탁통치안을 제안하면서 반대하는 우파와 찬성하는 좌파간의 대립이 격렬해졌다. 대표적인 정치지도자로는 이승만과 김구를 들 수 있다. 이화장에서 기거하던 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제헌 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민족운동가 김구는 경교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분단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열정을 불살랐지만 안두희에 의해 시해되는 불운을 겪는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은 다시 폐허가 되고 만다. 전쟁 동안 150만 서울 시민 중 110만 명 이상이 서울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정도로 서울의 피해는 막심했다. 1953년 9월 전쟁이 끝난 후에야 새로운 도시 건설에 주력할 수 있었고, 제분·제당·방적 등 원조 물자를 이용한 제조업이 제일 먼저 재생되었다.
경성시에서 서울시로 명칭이 공식적으로 바뀐 것은 미군정이 <서울시헌장>을 발표하고 한달이 지난 1946년 9월 28일이며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로 전환되고 1962년부터 서울시는 국무총리 직속의 행정기구가 된다. 초대 정권인 이승만 정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독재정치로 변질되었고,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를 저지른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과 시민들에게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폭발하였고,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게 된다. 부정선거와 경찰의 폭력에 반발하면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 4·19혁명의 성공으로 대한민국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서울특별시, 세계의 메트로폴리스로.
- 1986. 아시안게임, 1988 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 개최
1961년 박정희 정부 이후 70년대 말까지 연평균 9퍼센트라는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이루며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서울의 면적도 지속적으로 확장되는데 1963년 양주군·광주군·시흥군·김포군·부천군 일부가 서울시로 편입되었고, 1973년 약 605제곱킬로미터로 확장 된다. 서울에 지하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4년 8월 15일로 서울-수원, 서울-인천, 용산-성북, 서울-청량리 총 98.7킬로미터에 달하는 구간이었다. 이것이 지금 말하는 지하철 1호선에 해당한다. 한적한 농촌지역이었던 강남은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었고 강남개발의 필요성에 따라 1969년 말부터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1970년대 서울시정의 최대과제는 ‘강북인구집중억제’ 정책 이었고 이에 따라 영동지구 개발이 가속화, 강남개발촉진이 진행되었다. 강북에 있던 유서 깊은 고등 학교를 대부분 강남으로 이전시켰는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강남으로 이전하였고 강남이 교육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서울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86서울아시안게임 개최, ’88서울올림픽 개최이다. 남북 분단 상황 등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회를 성황리에 마무리했으며 1970년 대 이후 고도성장으로 격상된 지위를 전 세계에 뽐낼 수 있었다. 특히 88올림픽은 서울과 일본의 나고야가 경합을 벌인 끝에 52:27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최국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이 제 12회 월드컵 경기를 공동으로 개최하면서 전 세계의 시선은 다시 서울로 쏠리게 된다. 한국은 세계 강호인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물리치고 4강에 진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고 ‘붉은악마’응원단의 열광적인 응원이 세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서울의 변화를 크게 보여주는 것은 청계천이다. 1760년에 원형이 완성된 청계천은 남촌과 북촌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자 서민들의 생활터전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대륙 침략 수송로로 활용하기 위해 세종로사거리에서 무교동까지 청계천을 복개했고, 광복과 6·25 등의 혼란을 거치면서 청계천은 방치되었다. 쓰레기와 오물이 청계천에 쌓여가자 서울시는 복개를 결정하고 광교에서 신답철교까지 순차적인 복개를 진행했다. 그러나 서울이 더욱 발전하자 개발과 성장보다는 문화와 환경에 더 큰 가치를 두게 되었고 2003년 7월부터 복개된 도로를 걷어내고 청계천을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한 끝에 2005년 10월 1일 청계천이 정식 복원되었다.
서울의 인구는 1950년 160만명에서 2008년 1,042만여 명으로 늘어났지만 세대당 인구는 5명에서 2.6명으로 줄었다. 광복 직후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8층짜리 반도호텔이었지만 지금은 3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숲을 이루고, 광복 직후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는 한강대교가 유일 했지만 현재는 25개의 교량이 건설되어 있는 등 서울은 한국의 발전과 더불어 크게 달라져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 시장 같은 재래시장 에서 상품을 구입했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백화점 이용이 급증 했다. 1990년대 이후 인터넷 시대가 도래 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상상을 초월한 변화가 일어났다.
21세기는 국가대 국가 보다는 도시 대 도시의 경쟁이 더 치열해질 것이다. 이에 따라 서울은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가 되기 위해 국제금융 및 비즈니스 산업, 정보통신, 디지털 콘텐츠, 패션산 업, 바이오산업을 5대 전략산업으로 정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서울시는 살기 좋은 환경도시를 위해 계속 진화하고 있으며 2005년 6월에는 115만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넓은 공원, 서울 숲이 개장하였다.
2004년 7월 1일, 서울시는 대대적인 교통체계 개편을 시행한다. 과감한 중앙버스전용차로 설치와 함께 전차·버스 연계 수송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대중교통 요금 부담을 대폭 줄였다. 또한 간선노선과 지선노선 이원체계로 정립하고 중앙버스전용차로를 이용해 신속성을 확보함으로써 과포화된 서울의 교통상황을 효과적으로 정리하였다.
현재 서울시는 어느 정도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판단되는 바, 21세기에는 문화·환경·복지·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일류도시가 되는 것을 서울시의 비전으로 삼고 있다. 서울시가 추구하는 일류도시란 사람 향기가 가득한 따뜻한 도시, 자연을 닮은 쾌적하고 편안한 녹색도시, 세계를 담는 활기찬 도시, 유구한 역사문화 도시를 일컫는 것으로 서울시가 추진하는 다양한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서울은 세계적인 브랜드 가치를 지닌 일류도시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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