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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은 왜 5월 15일일까? 그 이유는 바로~~

by 카이로 B.G.PARK 2025.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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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15일은 세종대왕이 탄생한 지 628주년이 되는 날이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96) 세종대왕을 기억하는 공간들

2025년 5월 15일은 세종대왕(1397~1450, 재위 1418~1450)이 탄생한 지 628주년이 되는 날이다. 세종은 1397년 4월 10일(양력 5월 15일) 한성의 북부 준수방에서 태어났는데, 1965년에 5월 15일을 스승의 날 기념일로 지정하기 시작하였다. 세종을 민족의 스승으로 인식하였기에, 세종의 탄생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것이다. 서울에는 세종의 탄생지뿐만 아니라 경복궁, 광화문 등 세종을 기억하는 공간이 많이 남아 있다.

세종의 탄생지, 서촌 지역

세종은 1397년 4월 10일(음력) 현재의 서울 서촌 지역인 한양의 북부 준수방(俊秀坊)에서 아버지 이방원과 어머니 여흥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방원이 아직 왕이 되기 전으로서, 조선시대 왕자들은 궁궐 안이 아닌 궁궐 밖에서 거처했던 만큼 세종도 궁궐 밖에서 태어났다.

『세종실록』 총서에는 “태조 6년(1397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 준수방 잠저(潛邸:왕이 되기 전의 거처)에서 탄생하였으니, 명나라 태조 고황제(高皇帝) 홍무(洪武) 30년이다. 영명(英明) 강과(剛果)하고, 침의(沈毅) 중후(重厚)하며, 관유(寬柔) 인자(仁慈) 공검(恭儉)하고, 또 효도하고 우애함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고하여, 세종의 탄생지와 함께 총명하고 중후,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던 세종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통인시장 입구에 세종대왕 탄생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현재 서울의 서촌 통인시장 인근 대로변에는 세종대왕 탄생을 알리는 표지석을 볼 수가 있는데, 실제 세종이 태어나신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북부 준수방이라는 기록이 유일한 단서로서, 준수방이 현재의 서촌 지역인 만큼 서촌에서도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거리에 표지석을 세운 것이다.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 ‘서울 건천동’에서 탄생한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에 중구 인현동 명보아트센터 앞에 표지석을 세운 사례와도 유사하다.

서울에서도 인물의 탄생지와 거주지와 관련된 곳에 설치된 표지석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대로변에 설치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함이다. 유명한 인물은 모두 길거리 출신이라는 오해는 갖지 마시기를. 서촌을 ‘세종마을’로 부르고, 세종마을 음식문화의 거리, 세종마을 편의점 등 세종과 관련된 상호를 많이 사용하여 세종이 이곳에서 탄생했음을 널리 일리고 있다. 최근에는 서촌을 방문하면서 ‘이도림’이라는 카페를 들른 적이 있는데, 예상대로 세종의 이름 ‘이도(李祹)’를 카페명으로 쓴 것이었다.
1418년 8월 10일 세종의 즉위식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렸다.

경복궁에서 즉위식을 올리다

1418년 8월 10일 세종의 즉위식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렸다. 『세종실록』 총서의 기록을 보면, “태종이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경복궁에 나아가 신왕의 즉위를 축하하게 하였다.”고 하여 태종이 세종의 즉위식에 깊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경시(庚時:오후 5시경)에 종실과 문무백관이 조복(朝服) 차림으로 경복궁 뜰에서 서열대로 늘어섰다. 세종이 원유관에 강사포를 입고 근정전에 나오자, 여러 신하들이 하례를 올리고, 성균관 학생과 회회 노인(回回老人)과 승려들도 모두 참여하였다.”는 실록을 통해서는 아라비아 지역의 대표와 승려들까지 즉위식 행사에 참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위식과 함께 세종은 태종을 상왕으로, 어머니를 대비로 높였다. 세종은 “일체의 제도는 모두 태조와 우리 부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도를 따라 할 것이며, 아무런 변경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태조와 태종의 업적을 계승해 나갈 것을 천명하였다. 이어서 “이 거룩한 행사에 부쳐서 마땅히 너그러이 사면하는 명령을 선포하노라.”고 하면서, 즉위식을 기념하는 사면령을 시행하였다.

세종이라는 왕이 지니는 상징성, 조선 왕의 즉위식 중 가장 축제적인 분위기에서 거행된 행사라는 점은 세종 즉위식의 의미를 더욱 크게 하고 있다. 오늘날의 대통령 취임식에 해당하는 조선시대 왕의 즉위식 대부분은 선왕의 장례식에 수반되는 슬픈 행사였다. 그러나 4대 세종의 즉위식만큼은 기쁜 즉위식이 되었다. 태종이 스스로 상왕이 되면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즉위와 함께 집현전(集賢殿)을 학문연구와 인재 양성의 중심 기관으로 삼았다.

집현전의 설치와 인재 양성

세종은 즉위와 함께 집현전(集賢殿)을 완전한 국가 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연구와 인재 양성의 중심 기관으로 삼았다. 집현전이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 때 처음 사용되었고, 조선 정종 때도 집현전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실제 학문 연구기관으로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였다.

세종은 집현전에 ‘재행연소자(才行年少者)’라 하여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 등이 집현전으로 들어왔다. 집현전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修政殿) 자리로 왕이 조회와 정사를 보는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만큼 왕이 집현전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했음을 알 수가 있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볼 수 있고, 연못이 있는 경회루 남쪽에 위치해 풍광도 좋았다.

1420년(세종 2) 3월 16일 집현전의 직제가 정비되었다. 집현전은 궁중에 둔다는 것과,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하여 집현전에 근무하게 하여,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왕의 자문에 대비하였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집현전에는 세종 시대에서 단종 시대까지 총 96명의 학자가 이곳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문과(文科) 합격자의 명단을 기록한 ?국조방목?의 기록을 보면 집현전 학자 전원이 문과 급제자 출신임이 나타난다. 그것도 장원 급제자가 정인지를 비롯한 16명, 2등이 6명, 3등이 신숙주 등 11명, 4등이 7명 등으로 전체 집현전 학자 중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5등 안에 합격한 최고 인재들이었다. 이들에게 세종이 부여한 임무는 독서와 학문연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책 결정과 국가 주요 간행물의 편찬 사업이었다.

세종이 집현전을 자주 방문하여 학자들을 격려한 모습은 신숙주와 관련된 일화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어느날 밤 세종은 집현전에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은 모습을 보고 이곳을 찾았다. 밤을 새면서 연구를 하던 신숙주가 깜빡 잠이 들어 있는 모습을 확인한 세종은 왕 입고 있던 용포(龍袍)를 덮어주고 격려하였다. 리더가 아래 사람을 대할 때의 대표적 모범 사례인 이 일화는 현재까지도 훈훈한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세종의 업적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글의 창제와 반포이다.

한글학회와 한글박물관

세종의 업적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글의 창제와 반포이다. 1446년 9월(음력) 오랜 연구 끝에 세종은 우리 글 훈민정음 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를 반포하였다.

“나랏 말씀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를 불쌍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생활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노라.”

세종 이전까지 우리 글은 없었다. 그동안 입으로는 우리 말을 하고 글은 한자를 빌어다 쓰는 생활을 해 오면서, 그 불편함은 매우 컸다. 세종은 어려운 한자를 대신하여, 백성들도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자음과 모음 28자로 이루어진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1443년에 만들었고, 1446년 9월에 반포하기까지 3년의 시간을 더 들였다. 특히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든 의미까지를 밝혀 놓은 서문의 존재로 인해 훈민정음은 더욱 빛이 난다. 세종의 자주, 애민, 실용정신이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한자나 알파벳 문자에 그 글자를 만든 목적이 적혀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세종이 창제한 한글의 정신과 의미를 계승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학회가 한글학회이다. 1908년 한국어와 한글을 연구하는 민간 학술 단체로 출발하였는데, 최초의 명칭은 ‘국어연구학회’였다. 1913년 3월 ‘한글모’로 학회의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일제의 감시로 학회 활동이 위축되었다.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로 조직을 확대하였고, 1931년 1월에는 ‘조선어학회’ 명칭을 바꾸었다.
조선어학회는 1949년 10월 한글날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27년 2월부터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는데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큰 수난을 당했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태진, 정인승 선생 등이 실형을 선고받았고, 이윤재와 한징 선생은 옥사했다. 조선어학회는 해방 후 재건되었고, 1949년 10월 한글날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광화문역에서 서울역사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한글회관 건물이 있고, 현재에도 한글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19년에 개봉된 영화 ‘말모이’는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1940년대 일제강점기에 독립군, 독립운동가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일제에 항거하며 말과 마음을 모아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은 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

용산에 자리를 잡은 한글박물관은 한글과 한글문화 가치의 보존, 확산, 재창조를 위해 2014년에 설립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부지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월인석보와 정조의 한글 편지 등 국가지정 문화유산급 유물 26건 257점을 비롯해 8만 9000여 점의 유물을 1층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2025년 2월 한글박물관에 화재가 일어났지만, 다행히 이곳에 보관하고 있던 유물들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세종대왕 동상 출입구 뒤편으로 들어가면 ‘세종이야기’ 전시관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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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동상, 광화문 광장에 자리를 잡다

무엇보다 세종을 기억하는 대표적인 공간은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이다. 1968년 광화문 앞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조성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위인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우리 역사상 최고의 왕이라는 점과 경복궁에도 실제 거처했던 세종의 동상을 이곳에 조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2009년 10월 9일 한글날에 마침내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지면서, 41년간 외롭게 광화문 광장을 지켰던 이순신 장군과 함께 문과 무를 대표하는 우리 역사 속 인물이 함께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세종대왕 동상은 높이 6.2m, 폭 4.3m 규모로 기단 위에 좌상으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이순신 장군 뒤 250m에 위치하고 있다.

세종대왕 동상 출입구 뒤편 비밀의 문처럼 생긴 곳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내려가면 서울시에서 조성한 ‘세종이야기’ 전시관을 만날 수 있다. 세종대왕 연대기, 한글 창제와 과학, 음악의 업적 등에 대한 자료가 미니어처와 체험존 등으로 조성되어 특히 어린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이 있는 5월에 세종을 기억하는 공간들을 찾아보는 것은 더욱 의미가 클 것 같다. 
 
출처 :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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